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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웹진] 기계의 역습
제목 [오늘의 웹진] 기계의 역습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1-26 11:42:33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41
  • 평점 0점

<영화 읽기> 기계의 역습
 
<피에타>(2012)

 

   기계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시대, 근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기계에 인간은 매혹됐고 그것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아니,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고 구원을 가능하게 해주리라 믿었다. 그것은 ‘신’의 자리를 꿰찬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는 인간이 주인이 된 시대라고 하기보다 기계가 주인이 된, 즉 기계의 시대로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새로운’ 근대가 도래해도 그것은 인간의 바람에 충분히 응하지 않았다. 도리어 인간의 성장과 구원은 지연되었고 기계와 함께한 미래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다. 기계의 운동에 장단을 맞춰 신체를 기계화했으나 몸과 정신은 피폐해졌다. 기계를 신에 가까워지도록 개발에 하였으나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무한을 대면할 뿐이었다. 기계화 또는 기계주의는 절대화되었으나 깊은 상처와 허무를 안길 뿐, 인간은 기계에 의해 더 무력해졌다. 생존을 위해, 밥벌이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고 충성할 수밖에 없는 기계의 제국 또는 기계의 독재가 도래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은 기계를 절대화했다. 기계에 집착하여 인간성보다 기계성을 최대 가치로 삼았다. 하지만 기계에 의한 상처와 허무를 역사화하면서부터 어느덧 그를 의심하고 저항하고 있기도 했다. 무릇 제국과 독재가 저에게서부터 균열과 틈을 키우듯, 그 의심과 반성이 기계로부터 이루어지는 역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까 기계를 존재론적 기반으로 둔 숱한 언어-매체 등에 의해서 말이다. 기계를 기반을 둔 숱한 언어-매체가 있지만 가장 대중적인 그러면서 이중적인 언어로 ‘영화’를 들 수 있다. 영화는 기계의 발전을 바탕으로 태어났으며, 그 어떤 언어보다 기계를 신격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카메라-기계로 이미지의 설득력과 흡입력을 극대화하고 그 속에 시간과 속도를 부여하여 그 무엇보다 기계의 특질에 근접했다. 그런데 그렇게 스펙터클화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기계적 이미지의 공허함, 타자화의 문제를 알리는 언어로 기능하기도 했다. 기계처럼 반복되던 클리셰와 선정성, 그리고 기계의 눈으로 왜곡된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 때문에 인간은 기계-영화로 기계화된 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기계-영화로 그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었다.

 

   근대가 도래한 이 땅도 기계의 제국이라 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근대적 기계에 의해 역사적 상처를 입었으며 그로부터 급진적으로, 강박적으로 기계화에 집착한 공간이다. 하지만 병적인 기계화로 다양한 고통을 겪은 만큼 그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전개된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50년 동안” 기계 제국의 엔진이었으며 앞으로도 “빌딩”으로서 그 정체성을 연장할 청계천은 이 땅의 가장 기계적인 공간이다. 허나 그런 만큼 “50년을 여기서 버텼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없었어,” “돈이 뭔가,” “죽음이 뭔가”라는 의심과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그 공간에서 일어난 기계 또는 영화적 고장error로서 기계를 의심하는 그리고 인간을 성찰하는 기계-언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카메라는 기계의 문제에 집중한다. 즉 자살을 시도하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자살을 유도하는 ‘기계’에 초점을 맞춘다. 프레임을 가득 메우고 클로즈업된 기계는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고 그의 몸속에 침투하고 있다. 또는 강조된 쇠갈퀴와 쇠사슬로 ‘뱀’ 즉 인간의 ‘원죄’를 상기시키며 우리의 각성을 유도하고 있다.

 

   자살 ‘당한’ 인물의 마지막 거처를 통해 알 수 있듯 기계화는 하층계급에 더 지독하게 적용됐다. 기계의 제국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떠받치고 있는 그들은 가장 성실한 기계 또는 부품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화를 거부하고 다른 삶 또는 욕망을 채우려 하면 그들은 가감 없이 상처 입거나 죽음을 대면해야 했다. 기계를 멈추고 섹스를 하던 부부, 기계가 아닌 노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계송, 아스피린이 아닌 친구와 술을 마시려 했던 자살남, 돈을 “실컷 쓰고나 죽자고 빌렸” 던 추락남 등 기계의 바깥을 꿈꿨던 모두는 상처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들의 내면을 감시하던 제국의 하수견 이강도 또한 마찬가지. 모성이라는, 기계성의 바깥을 붙잡으려던 그는 삶을 놓치게 된다. 그의 죽음이 하필 트럭-기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죽음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는 기계의 전일적 영향력을 말한다. 그 죽음 주변을 뒤덮고 있는 기계 이미지들. 도로-기계와 그를 오가는 수많은 차-기계, 그와는 반대로 생명력을 잃어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와 침묵하는 한겨울의 산. 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계(성)의 영향력을 표지하는 것으로서 기계의 바깥은 없음을 보여준다.

 

   기계 또는 부품이 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던 그들.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기계의 제국에서 일그러진 행동으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들은 ‘살아있는’ 동물을 가감 없이 죽이며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었다. 즉 기계화의 전일적 지배에도 여전히 자연성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동물을 죽이며, 그에 대한 질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실된 자연성을 동물을 통해 확인하거나 지워버리면서 비극적 운명을 분담하려 했다. 동물을 향한 그들의 잔혹함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들의 고통은 더 진하게 드러난다. 미선이 자기 아들을 강가에 묻었던 것도 기계의 제국에서 벗어나 자연 일부로 복귀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아니,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자’ 했던 것과 저의 아들과 땅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도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계의 제국에서 인간은 죽이거나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카메라가 이들의 삶 아닌 삶을 매번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담아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항상 기계에, 쇳덩이에, 청계천에, 깨질 듯한 창문에 그들이 갇혀 있던 모습으로 말이다.  

 

   ‘죽임’과 ‘죽음’으로밖에 제국의 독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조차도 완전한 해방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겹겹이 쌓여가는 상처와 고통의 역사에 침묵으로 일관해야 할까. 기계처럼 무한히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피에타>가 전하는 비명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우리는 이미 응답하고 있지는 않을까. 전술했지만 기계의 제국이 지닌 역설적, 반동적 언어-영화로서 <피에타>를 인식하여 그의 가능성과 생산성을 일궈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피에타>의 카메라는 제국의 엔진, 즉 서울의 청계천에서 무한히 운동한다. 마치 내시경처럼 엔진의 내부를 속속들이 점검한다. 그런데 그것이 포착한 것은 온갖 고장 난 기계-부품이다. 카메라는 그들을 포착하느라 균일한 동선을 그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불안정한, 흔들리는 움직임으로 내파된 엔진 또는 심장을 보여준다. 그 움직임이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완벽할 것 같았던 제국의 파국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언어로 기능한다. 제국의 심장이 지독하게 병들어 있음을 목격하며, 그 체제가 더는 지속할 수 없음을 예감하고, 더는 지속해서는 안 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계의 역습에 대응하는 영화-기계의 역습, 그의 예감과 선언은 죽음이 아닌 삶으로 인간성의 회복을 꾀하는 이 시대의 가장 생산적인 역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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