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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웹진] 염치의 미덕
제목 [오늘의 웹진] 염치의 미덕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1-08 09:15:43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277
  • 평점 0점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4대강 사업이 있다. 이것은 많은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대로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사업이자 따라서 실패한 사업으로 규정되는 것이 대세인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세를 거두고 보면 대중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4대강 사업을 지지하며 그 효과를 강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사태도 있었다. 대중들은 4대강처럼 이 두 사건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대응에 대해서도 역시 그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주장할 수 있다. 누군가는 정부를 비난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정부의 방침을 지지하고 옹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간에 희생자와 그 후유증을 생각할 때, 한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기층 모순에 대해 정부가 그 위임된 공권력을 눈앞의 질서와 치안을 명분으로 현명하지 못하게 사용했다는 비난만은 피하기 어려울 듯싶다.

문인들이 이러한 현장에 함께 했었다. 어떤 문인들은 성명서에 동참했었다. 그런가하면 어떤 문인들은 현장방문 등 현장에 밀착하려고 했고, 소수의 문인의 경우에는 비대위 등과 결합해 조금 더 실천적인 사업을 모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현장의 중심에 있는 문인을 지원하는 문인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문인들은 자신의 성정과 주어진 여건, 경제적 상황, 문단의 입지 등 다양한 기준에 맞춰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신문, 잡지, TV방송과 같은 미디어들이 이 많은 문인들과 역할을 모두 주목할 수는 없다. 문인들끼리 그저 기억하고 간간히 술자리에서 회자될 뿐이다.

미디어의 한계는,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대중의 한계이다. 대중의 시선과 인식은 많은 경우 미디어의 시선, 그리고 인식과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들 역시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어느 정도의 역할과 강도로 이러한 현장에 접촉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실생활에 그리 큰 영향력이 없는 문단 자체에 관심이 없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대중들은 대개 미디어에 노출된 문인들에게 주목한다.

현장과 문인의 관계에서 미디어는 대개 현장 속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그리고 현장을 이끌어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문인을 주목한다. 이것이 하나의 범주이다. 대추리, 기륭, 용산 등 에서의 송경동 시인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범주는 바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유명 문인들의 현장접속이다. 여기서 접속은 간단한 방문, 발언, 집필 등을 들 수 있겠다. 아쉽게도 이 두 범주에 속해있지 않은 문인들은 거의 미디어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전자를 예로 들어보면, 많은 대중들은 송경동 시인은 알지만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었던 오도엽, 문동만, 송기역 시인 등은 알지 못한다. 그들보다 한 발 물러서서 송경동 시인을 지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장기적으로 애썼던 문인들은 더욱 알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많은 문인들의 실천적 활동들이 한 사람의 공로로 수렴되어 버리는 결과가 없지 않다. 말하자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들러리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박탈감 역시 당연하다. 이 경우에는 그나마 송경동 시인이 실천적 활동 중에 누구 못지않은 수고로움과 고달픔을 감내했다는 측면에서 이름없이 그와 함께 했던 문인들의 박탈감이 적다 할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유명 문인들이 현장에서 이렇다 할 수고로움과 고달픔을 감내하지 않은 채, 트윗터의 몇 글자로, 인터뷰의 몇 마디로, 몇 편의 글, 한 권의 책으로 주목받을 때, 그래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이 작가는 정말 의식이 있고 실천적인 작가다!’라는 평가를 가져갈 때, 이것은 이름없이 현장과 결합하고 있는 문인들에게 크나큰 박탈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 문인들 중에는 누가 주목하던 주목하지 않았던 오랫동안 노동이나 빈민 현장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온 이도 없지 않다. 미디어에 의해 이슈화되지 않은 시기에도 묵묵히 그 분야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해온 그들에게 그 소외의 감정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사회의 모순이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표출되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공동체 전체의 고통으로 느끼며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려 할 때, 그 방식과 역할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고, 또 민주주의 사회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 또 열린 체계를 위한 열린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각자의 재능과 입지에 따른 방식과 역할의 선택이 효율적이다. 문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현장 속에서 투쟁할 때, 또 누군가는 현장 밖에서 글을 쓸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그 경계를 오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과 역할의 강도에 따른 몫은 정당하게 지불되어야 한다.

우리는 경제적 가치의 잉여 초점 현상만큼이나 문화적 가치 역시 그 잉여 초점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문화적 ‘허명’이 발생하고, 왜곡된 문화적 권력과 문화적 서열이 발생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디어와 대중의 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문화적 담론이 이것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관적인 그리고 막연한 의견을 덧붙이자면, 문화적 담론의 경우 서사와 의미의 오염 시대라는 말에 걸맞게 그에 따른 담론 역시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대개는 고급 감상문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현상과 관련해, 얼마만큼은 문인들 스스로의 각성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나 나는 참여에 대한 몫이 정당하게 지급되지 못하는 불완전한 대중적 환경 속에서 유명문인들 스스로가 ‘현장’과 ‘시대’를 언급하는데 있어 염치의 미덕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현장과 시대에 대한 그들의 진정성까지야 의심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한마디가, 한 편의 글과 한권의 책이 대중사회에 배포되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거대한 박탈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실천적 활동에 있어 그 방식과 역할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의미부여와 관심 역시 정당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고통의 중심에서 외치던 문인과 그 고통이 지나간 후에 자신 역시도 그러한 의식을 가졌었노라고 외치는 문인에 대한 댓가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대중 속의 이름값이 이름없이 현장과 시대의 고통과 그 의미를 지켜온 사람들의 이름값이 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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