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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입니다.

[오늘의 웹진] 우리 시대의 절필
제목 [오늘의 웹진] 우리 시대의 절필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2-11-30 10:32:45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82
  • 평점 0점

 

오늘의 웹진은 조영일 선생님의 문화 논쟁입니다. 

 

<문화 논쟁> 우리 시대의 절필

- 고종석의 ‘절필’에 대하여

  얼마 전 ‘에세이스트’(그 한국에서 이 명칭에 걸맞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다) 고종석이 절필을 선언하여 많은 사람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신문사에서 기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틈틈이 양질의 에세이집을 펴내고 소설까지 몇 권 쓴, 말 그대로 글쓰기가 삶 자체였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런 사람에게 ‘절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쉽게 예단하기 힘든 문제이다. ‘절필(絶筆)’의 사전적 정의는 ‘붓을 놓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아니함’이라고 되어 있다. 쉽게 말해, 원래 글을 업으로 삼던 사람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의미에서라면, 절필을 한 사람이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을 것이다. 

  사실 글쟁이에게 ‘절필’만큼 유혹적인 것도 없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글쟁이들은 ‘절필(글을 그만 쓰겠다)’을 입에 담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마치 연예인들이 남의 눈을 의식하는 일반인처럼 살고 싶다고 틈만 나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본인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그것을 업으로 삼게 되면, 수시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며, 실제 포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때 어쩔 수 없이 결정한 ‘포기’는 보통 ‘실패’로 받아들여지기에 당사자라면 가급적 이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것이 보통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글쟁이들도 글이 잘 써지지 않은 경우가 생긴다. 흔한 말로 ‘슬럼프’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문제는 이것이 유독 이쪽에서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물론 글을 쓰는 행위가 다른 일보다 값어치 있는 고차원적인 행위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일반 직장인의 업무 처리와 같은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모든 것(글감, 주제, 글 쓰는 환경 등을 포함하여)을 선택하고 스스로 통제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프리랜서적 피곤함(밸런스 붕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문(賣文)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포기’에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그것은 ‘포기’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로 돌린다. ‘글을 그만 쓰는 것’과 ‘절필’의 의미가 표면적으로만 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그냥 본인이 알아서 쓰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후자는 나 아닌 누군가에게 공표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즉 ‘절필’의 경우, 자신이 글을 쓰지 않은 이유를 타인들이 알아줄 때야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절필은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무언가를 비판(고발)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고종석은 무엇 때문에 신문의 칼럼난까지 빌어 ‘절필’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내가 글쟁이로서, 다시 말해 얼치기 기자이자 얼치기 소설가이자 얼치기 언어학자로서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달포 전쯤, 술자리에서 친구 차병직이 자조적으로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절필을 생각했다.
(고종석, 「절필」, 《한겨레》, 2012.09.23, 강조는 인용자)
 
  그가 절필을 생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친구의 말(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과 관계가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적어도 후자의 경우는 뭐랄까 뜬금없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몇 십 년 동안 글을 써온 그가 위와 같은 고민을 이전에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가정하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미’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해왔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희극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표면적인 계기가 진짜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글쟁이들에게 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쉽게 가늠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판매량’이다. 따라서 설사 속물적으로 보일지라도 고종석이 자신의 글이 가진 영향력의 한계를 판매량과 연관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솔직한 태도이다. 하지만 인문교양 분야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그래도 그는 소위 잘나가는 인기 필자로 분류되는 글쟁이다.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그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종석이 자신의 책이 별로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절필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 손가락으로 셀 정도의 글쟁이만 빼고 거의 모두가 절필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덧붙임으로써 자신이 문제삼고 있는 것이 단순히 판매량의 문제가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적인 이야기이다. 이는 다음을 읽으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는 글쟁이의 무력함에 대한 예로서 백낙청을 들며,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그리도 많은 글을 쓴 백낙청이 통일부 중하급 관료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라고 되묻는데, 이런 자조적 물음이 부적절한 것은 첫째 백낙청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만 책은 거의 팔리고 있지 않으며, 둘째 백낙청은 고종석처럼 그저 글쟁이에 머물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어서, 사회적 영향력에서 최소한 국회위원의 보좌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백낙청의 예를 고종석만의 썰렁한 조크 이상으로 받아 들어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절필을 하도록 이끈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안철수의 생각』(2012)이라는 책이 아닐까 한다. 출판시장에서 책의 가치는 많은 경우 그 내용보다는 판매량과 그것을 보장하는 저자의 이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그가 직접 그것을 썼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안철수의 생각』은 안철수가 직접 펜이나 키보드를 꼭꼭 눌러 가면 쓴 것이 아니다. 이는 다른 유명인의 책도 비슷한데, 그들은 소스(또는 생각)를 제공할 뿐이고, 가공을 하고 형식을 부여하는 사람(보통 유령작가라고 불리는)은 따로 있다. 최근에는 이들의 이름도 함께 기재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 책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전문적인 글쟁이의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만들어진 책이 매우 공을 들어서 한자 한자 써내려간 책보다 더 많이 팔리고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만큼 비위가 상하는 일도 없다. 그런 책을 내는 사람들은 뭐랄까 파렴치하게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준다. 하지만 자신들과는 공통분모가 없는 연예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경우라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시했겠지만, 안철수의 경우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어떻게? 아마 그것은 안철수가 그에게 있어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더 심한 박탈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책은 안철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 친구 차병직의 이와 같은 말과 그에 대한 반응(절필)은 ‘글로서 자신들이 할 일이 딱히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종석의 ‘절필’ 선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심각한 반응들은 확실히 희극적이라 하겠다.
 
  고종석은 변절할 사람이 아니다.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더라도 박근혜와 싸우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온몸으로 글을 써온 자신을 배반했다. 말의 한계에 직면한 글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깥을 향한 충동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글쓰기의 바깥이 정치판은 아니다. (…)

  언어(텍스트)의 바깥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지구적 논쟁 결과와 무관하게 글쓰기를 멈춘 정치판은 흥정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흥정에 실패하며 침울하고 역겨운 회귀만이 범람한다. 글쓰기의 바깥이 또 다른 글쓰기여야만 하는 까닭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바깥은 하나의 장소지만 비어있는 장소, 곧 안과 안 사이의 ‘공(空)=간(間)’이다. 그러니 고종석이 안철수의 옆자리에서 피로를 느끼고 빈 공간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곳엔 언어를 빼앗긴 채 신음하는 사람과 사물이 있다.

(박구용, 「고종석의 절필, 피로와 배반 사이에서」, 《경향신문》, 2012.10.5.)

  필립 로스와 고종석의 절필은 본인들의 해명과 달리 글쓰기에 대한 개인의 절망과 피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책 읽는 문화가 더 이상 숨쉴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잠수함의 토끼’들이다.
(조운찬, 「절필과 책읽기 혁명」, 《경향신문》, 2012.11.25)

  쌀을 짓고 글을 쓰는 자들이야말로 선한 농부여야 하고, 밥을 먹고 글을 읽는 자들이야말로 인류의 원초적 가치를 깨달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좋은 말이나 글은 한두 사람이 알아준다고 하여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순간 역사의 소유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말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요즈음, 그의 절필을 수긍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오히려 그 가치를 올바로 세워야 할 사람들은 고종석을 포함하여 말의 가치, 글의 힘을 굳게 믿는 우리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기웅, 「법정의 ‘절판선언’과 고종석의 ‘절필선언’」, 《한겨레》, 2012.10. 10)

  그런데 그의 ‘절필’선언에는 이전의 다른 절필 선언과는 명확히 구별된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글을 쓰지 않지만 트위터는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는 절필 선언과는 별개로 매일 같이 엄청난 분량의 트윗을 실시간으로 올리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절필 선언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초 김영하의 절필선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그에게 있어 절필이란 트위터를 포함하여 인터넷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쪽은 트위터만 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한 쪽은 트위터(를 포함하여 웹)에만 글쓰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김영하의 경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자세한 것은 검색을 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고종석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고종석의 선언한 절필의 핵심은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품격 있는 글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트위터에만 글을 쓰겠다는 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왜 하필 트위터인가? 이는 앞서 살펴본 절필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보자면, 트위터가 책보다 영향력이 있는 매체라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며, 고종석 자신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 정도로 시큰둥하게 반응을 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숨은 의도 따위를 찾는 것은 오버이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좀 더 밀고 나아가 보자. 고종석은 절필의 이유로서 책(글)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의 부재에 대한 깨달음과 안철수의 책에서 받은 알 수 없는 회의감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그 동안 적잖은 베스트셀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훨씬 책을 팔아먹지 못한 고종석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없었던 소설가가 트위터를 통해 어느 순간 한국문학의 대표자로까지 발돋움한 인물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트위터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이외수다. 그는 오늘날 공지영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글쟁이로 간주할 수 있는데, 불과 10년 전만 해도 대중적 인기와는 별도로 문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작가였다. 한국 문단의 대표자인 황석영은 이외수를 작가로 간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얼마 전 황석영의 주도로 이루어진 ‘야권 단일화 촉구 성명’이라는 것을 했는데, 여기에 뜻밖에도 이외수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주지하다시피 이외수는 여야의 대표적 대선 후보자 방문을 직접 받은 유일한 작가이다. 이제까지 한국문학에서 이처럼 융숭한 대접을 받은 작가가 있었나? 기껏해야 정부의 지원금을 얼마 따낸 것이 무용담으로 회자되는 수준이 아니었나. 문제는 그것이 그의 문학(책)적 영향력과는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름 권력욕이 있는 한국의 대표작가 황석영으로서는 똥 십은 얼굴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소설을 쓰고 구라를 까도 이외수의 재치 있는 트윗 하나보다 영향력이 없다. 

  물론 나는 고종석이 절필을 하고 트위터에 열심인 이유가 이외수처럼 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며, 또 설사 그럴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 왜냐하면 반복에 있어 두 번째는 빠짐없이 소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최근에 나온 이외수의 책들(대부분이 잡문집이다)을 보고 할 수 있는 것은 “책은 이외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거야! 우린 아니지!”라는 푸념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평론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웹진 문화다 링크를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링크 :  www.mu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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