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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죽음과 노동자의 죽음
제목 스타의 죽음과 노동자의 죽음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3-01-18 10:09:18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978
  • 평점 0점

 

오늘의 웹진은 권경우 평론가의 문화평론입니다.

 

스타의 죽음과 노동자의 죽음

 

   전 야구선수 조성민씨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리 자살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전 부인 최진실씨와 남동생 최진영씨가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조성민씨의 죽음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난 그들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담당 경찰서에서는 이례적으로 언론사에 자세한 취재를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의 요청에도 언론사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스타의 죽음을 보도했다.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과 어린 자녀들, 지인들에게 아무리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 그의 죽음을 끊임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 언론 환경은 '언론학 개론'을 다시 써야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다.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언론은 더 이상 '공영'의 역할을 하지 않으며, 수많은 인터넷매체는 연예인 가십거리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언론사들은 포털사이트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는가 하는 경쟁에 빠져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와 제목을 쏟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에게 유명인의 죽음은 기사의 클릭 수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그런데 유명인(celebrity)로서 조성민씨의 죽음을 대하는 언론들을 보면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죽음도 소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지난 연말 대선 이후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이 겹쳐지면서 ‘유명인의 죽음’과 ‘노동자의 죽음’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언론은 유명인의 죽음을 때로는 생중계까지 할 정도이지만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왜 노동자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보도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몇 년 동안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반응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의 죽음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나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철저하게 사회적인 노동자의 죽음들이 오히려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개별화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대선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씨의 경우에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삶과 죽음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유서에서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라고 적었다. 그의 죽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최근 연이어 생을 마감한 이운남, 최경남, 이호열, 이기연의 죽음 역시 개인적 불운이나 비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죽음들이다. 오늘날 노동자의 죽음은 개인적인 사적 과정으로 진행되는 거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것, 즉 우리들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공적 문제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생을 마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회는 ‘나약하고 무능력하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죽음의 계급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한국의 현대사에는 사회적 죽음이 유독 많았다.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의 죽음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독재와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열사’라는 호칭을 두고 가치를 부여해왔다. 죽음 자체의 정당성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노동자의 죽음은 더 이상 가치를 갖지 못하고 죽어가는 당사자 역시 죽음의 정당성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자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과정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죽음이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한다면, 그 사회는 그러한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그렇다고 죽음을 멈출 만한 그 어떤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회에서, 앞으로 이어질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과 행동을 취할 것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 개인의 죽음은 ‘열사’는 커녕 ‘개죽음’에 가깝다. 그들의 죽음은 언론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유명인의 죽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제 죽음도 경쟁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좀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죽어야 하고, 죽은 자의 사연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집단 혹은 동반 자살이어야 그나마 언론에 한 줄이라도 보도가 나온다. 이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든 인간의 생명(목숨)은 소중하다는 기본적 인권의 가치는 무너진 것만 같다. 노동자의 죽음과 유명인의 죽음이 결코 같지 않은 것은, 죽음 역시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계산되고 값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음과 대비되는 출생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재벌가에서 태어나는 것과 극빈층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같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태생적으로 불평등을 전제로 성립한다. 하지만 21세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과거의 불평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제들을 동원함으로써 이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까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년 11월 SBS에서 방영한 <최후의 제국>(The Last Capitalism)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미국의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수 정치인에게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서죽어도 된다는 말인가’ 하는 사회자의 질문이 던져진다. 그 정치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오히려 방청객들이 주저 없이 “YES!”를 외치는 것을 듣게 된다.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다는 생각은 더 이상 ‘보편적 진리’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 많은 평론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링크:www.mu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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