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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영화의 새로운 클로즈업: 낙담한 절반의 우리를 위한 노래
제목 유성-영화의 새로운 클로즈업: 낙담한 절반의 우리를 위한 노래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3-01-07 10:25:18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694
  • 평점 0점

 

 오늘의 영화 읽기는 지승학 영화평론가의 레미제라블입니다.

 

<영화 읽기> 유성-영화의 새로운 클로즈업: 낙담한 절반의 우리를 위한 노래

<레미제라블>


intoro.
   톰 후퍼 감독은 전작 <킹스 스피치>(2010)에서 격동의 역사적 사실 속에 표류하는 한 인간의 개인사를 절제 있게 조망하는데 탁월한 연출력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당시 ‘킹스 스피치’는 연극적 배경과 그 속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위엄있는 ‘목소리의 가치’를 흥미 있게 표현해 내는데 성공했었다. 바로 그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 다시 말해 톰 후퍼 감독이 피력하고자 하는 관심사는 바로 그 ‘목소리’와 목소리가 증폭될 수 있는 공간의 상관관계에 있었고 이를 표현하기위해 몸과 정신의 합일로 인한 발성의 체득 과정과 당대 기술발달의 상관관계를 내밀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콜린 퍼스)와 이를 치유해줄 테라피스트, 라이오넬(제프리 러쉬)은 그렇게 ‘연극배우 식 발성’ 혹은 ‘정확한 발음’에 모두 함께 천착해 있었고 연극무대 같은 연설 현장 혹은 라디오 연설을 위한 녹음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무대 안에서 그 ‘목소리’와 ‘기술(technology) 속에 놓인 대중들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슬며시 포개지고 있었다. 이제 그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아름답게 지지해줄 배경과 기술은 <레미제라블>로 옮겨가 좀 더 확장된 새로운 무대의 가능성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레미제라블>은 일단, 성-스루(sung through 혹은 through-sung: 대화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는 오페라나 뮤지컬)형식을 차용한 전에 없던 영화로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된다.

1.
   <레미제라블>(2012)은 엄밀히 말해 기존 뮤지컬의 감동공식을 답습하려는 어설픈 꼼수로 보기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가지고 있던 감동의 순수함을 어떻게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중한 고민의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장발장(휴 잭맨)의 고난과 고뇌, 그리고 인간적 갈등의 표출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야기 속에 놓인 깊이 있는 감동을 어떻게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감동의 순수한 전달의 문제가 더 중요한 가치로 설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영화 <레미제라블>은, 표면적으로는, 일단 ‘클로즈-업’을 주로 차용한다. 영화적 장치에서 이러한 감동의 전달과 이야기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영화적 전략 중 하나가 바로 ‘클로즈-업’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 바로 클로즈-업의 그 역사는 그래서 짧지만 짙다.

   얼굴의 표정, 그 미묘한 변화의 포착, 그리고 그로인한 감정이입(Empathy). 특히 얼굴의 이러한 무한의 가능성은 무성영화 시절, 경직된 상징체로서의 폐쇄적 의미에서, ‘유성영화(Sound Movie)’로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발전하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얼굴에서 목소리로의 의미 전이가 가능하게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음성의 자유를 얻은 ‘얼굴’을 통해 비로소 감동의 의미를 전달 할 수 있게 된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얼굴의 표정을 목소리가 지지해 줄 수 있게 되면서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선, 감성의 영역이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클로즈 업’이란 누군가의 천재성에 의해 발휘된 기술적 진보라기보다 감동을 전달하고 표현하려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클로즈업을 통해 많은 감독들은 얼굴 표정에서의 시선의 위치, 시선의 지시성, 시선의 의미를 세밀하게 강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바로 그런 시선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에 의해 결판나거나 평가되기에 이른다.

2.
   그런데 <레미제라블>의 클로즈업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장발장, 판틴(앤 헤서웨이), 자베르(러셀 크로우),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등, 그들의 얼굴 클로즈업은 다름 아닌 ‘목소리’ 때문에 시작된다.(전통적 클로즈-업은 얼굴-표정 때문이었다.) 얼굴로 인한 클로즈업을 목소리로 뒤바꾼 이 사건. <레미제라블>의 의미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은 <레미제라블>이 천착하는 의미와 자연스레 맞아 떨어진다.

   장발장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이 처한 고난의 현실은 노래로 인해 더욱 애절하게 끌어올려진다. 이때 사용되는 클로즈업은 그들의 얼굴 표정을 위해서라기보다 목소리를 클로즈업하기 위해서다. 모든 등장인물은 이 방식을 겪는다. 그래서 그들은 카메라로부터 소외받는 인물이 거의 없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촬영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부른 노래를 현장-녹음하기 위해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가야할 상황 때문에 자연스럽게 클로즈업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사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이면에는 <레미제라블>이 천착하는 개개인의 ‘음성’, 혹은 ‘목소리’, 그리고 그로 인한 민중의 혁명의지를 증폭시키려는 이중전략이 숨어있다.

   그렇기에 ‘클로즈-업’에 대한 의미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감동 전달을 위한 두 요소 즉 얼굴 표정과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가까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과 그로인해 관객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의도가 명확히 작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관객과 배우의 관계는 ‘본래의 영화적 장치’보다 가깝고, ‘본래의 뮤지컬 음성’ 보다는 먼, 그러나 서로 간에 하나로 수렴되고자 하는 역동성을 지닌 채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확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그 음성의 공감대를 더욱 가깝게 밀착 시킬 수 있는 ‘노래’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 개개인이 지닌 애절한 사랑의 감정들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우렁찬 함성과 합창의 선동-가(煽動-歌)들은 <레미제라블>로 하여금 민중의 혁명을 개인적 공감의 맥락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훌륭하게 강조하는 직접적인 장치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노래의 가치가 인간의 목소리를 전제한다는 사실과 그 목소리를 통해 혁명의 의미와 개인적 삶의 완성을 구원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현명하게 조율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다.

3.
   이는 매체의 혼성을 시도하는 전략에도 동시에 훌륭히 적용되는데 그것은 영화와 뮤지컬의 ‘실질적인’ 융합 혹은 통섭의 새로운 안착을 의미하기도 한다. 뮤지컬 형식의 영화와 드라마는 많지만 뮤지컬의 무대를 더욱 현실화 시켜 영화적 장점(물속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 초반 좌초된 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는 엄청난 스펙타클적 노역의 장면)과 뮤지컬 무대의 장점(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는 노역을 하는 장발장과 죄수들의 합창 장면)을 조응시키는 시도는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해준다. 그 중심에 바로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폭넓은 해석이 놓인다. 목소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감동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공감의 영역 중 하나가 아니던가. 조금은 투박하지만 진정성 있는 목소리로 점철되어 있는 <레미제라블>속 그들의 노래는 그렇게 증폭되고 발췌되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의 문제를 너무 가상적이지도, 너무 사실적이지도 않은 상태로, 감동 유발의 치유 영역을 안정적으로 파고든다.

4.
   이러한 통섭의 과정에서 특히 클로즈업을 수행하는 카메라의 역할은 더욱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카메라는, <레미제라블>에서만큼은, 일종의 현실적인 공간을 연극적인 무대로 환원시켜야 하는 전지전능한 기계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발장의 얼굴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그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자연경관 그 자체를 뮤지컬의 무대로 뒤바꿔버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장발장이 석방되고 난 이후 떠돌아다니는 과정에서 포착되는 광활한 자연 경관은 그렇게 그 자체로 뮤지컬의 무대로 흡수된다. ‘노래’로 인해 광활한 자연이 뮤지컬 무대로 뒤바뀌게 되는 이 엄청난 변화. 카메라의 새로운 가치창출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힘 역시 그렇게 ‘목소리’로부터 나온다. <레미제라블>은 바로 이러한 의도를 지루하리마치 성실하게 표현해 낸다.

   그런 식으로 형성된 무대의 축적, 노래의 축적, 클로즈업의 축적을 거쳐 마지막 죽은 자들에 의해 울려 퍼지는 ‘혁명가’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라는 질문으로 <레미제라블>의 바리케이트 위에 깃발을 꽂듯 감동의 정점을 찍는다. 그것이 동시대의 현실적 문제에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든, 뮤지컬의 한 요소를 더욱 현실감 있게 재현하여 만든 피상성 그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든 여하간 감동은 그렇게 전달되어 노래와 영상이 동시에 암전된 이후에도 여전히 깊은 여운의 울림을 한 동안 지속시킨다.


finale.
   그럼에도 <레미제라블>은 긴 러닝타임으로 인하여 자칫 답답함과 지루한 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영화, 오디션 프로그램의 난립으로 모든 관객이 심사위원의 자질을 지니게 된 대한민국 사람들의 까다로운 귀를 껄끄럽게 할 수 도 있는 영화, 겨울 방학을 맞이해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낚시질 한 영화로 평가 절하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뮤지컬의 형식과동일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색다른 영화적 감동만큼은 인정해야할 듯싶다. 빅토르 위고가 염원했던 민중들의 계몽과 감동, 역사적 사실이 주는 혁명적 에너지가 있다면 아마도 이렇게 순수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될 수 있으리라. 그 목소리는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의 젊은 민중들과 과거의 프랑스 혁명을 염원하는 젊은 민중들의 목소리와 일치하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그 아름다운 실패. 그리고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바닥에 놓인 비참한 자들의 인생. 그들의 그 마지막 감동의 폭발력은 그래서 실패를 넘어선 강렬한 열망으로서, <레미제라블>을 한번쯤 봐둬서 아니, 반드시 들어야하는 “바닥으로부터의 혁명의 노래”로 변모 시킨다. 그렇게 <레미제라블>은 유성(목소리)-영화(Sound Movie)의 새로운 혁명적 의미를 “낙담한 절반의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며 울려 퍼지길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레미제라블>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의 보이지 않는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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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www.mu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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